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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Edward Sagan
칼 에드워드 세이건

Carl Edward Sagan
1934.11.9. - 1996.12.20.

개요

칼 에드워드 세이건 (Carl Edward Sagan) 은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작가입니다. 천문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자연과학 분야들에 대해 대중적으로 소개한 책들을 주로 썼으며,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 직접 출연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외계의 생물에도 큰 관심을 가져서 외계의 지적생명 탐사 계획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생애

칼 에드워드 세이건은 1934년 11월 9일미국 뉴욕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계와 유대계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세이건이 다섯 살이 되던 1939년에 그는 뉴욕 세계박람회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미래를 주제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으나 그날 보았던 것들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세이건은 어렸을 때 하늘에 있는 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부모에게 도서관 카드를 받아서 도서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의 사서에게 별들 (Stars) 에 대한 책을 달라고 했는데, 사서가 클라크 게이블이나 진 할로 같은 스타들 (Stars) 에 대한 책을 가져다 주자 이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서는 웃으면서 천문학 책을 찾아서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천문학 책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비해 우주가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천문학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세이건이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그의 할아버지는 "좋아. 그런데 생계는 어떻게 꾸려 나가려고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천문학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학문이며 천문학자들은 궁핍하게 사는 것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이건은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다른 따분한 일을 계속 하는 동안에도 밤에 몇 시간 정도라도 별을 쳐다보며 공상에 잠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1948년, 세이건의 아버지는 뉴저지에서 코트 공장을 경영하기 위해 영업과 판촉 활동에 대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이건의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아버지에게 그를 사립학교에 입학시켜서 높은 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공립학교에 그대로 진학시켰습니다. 훗날 세이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다녔던 라웨이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과학에 관한 한 시간낭비를 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학년 때 생물 선생님이 그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할아버지 역시 천문학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통해 천문학을 공부하면서도 생계를 잘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 명의 천문학자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천문학자들은 그에게 천문학이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며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1951년, 세이건은 17세의 나이로 시카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았기에 이른 나이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대학 측에서는 과학 교육 전문가를 그에게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세이건은 바쁜 대학 생활 중에서도 과학 소설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며, 야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천문학 이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바로 교육학이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생명의 기원과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65년, 화성 탐사선 마리너 4호가 21장의 화성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는데, 이 사진들 속에서 생명체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화성의 대기압이 6mb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액체의 존재 가능성의 희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낮은 압력을 가진 곳에서 수분은 증발하거나 얼어있는 상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데, 이렇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생명체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도 화성은 매우 건조하고 황량한 곳이었고, 대기의 대부분이 이산화탄소로 되어 있는 곳임이 확실해졌습니다. NASA는 이 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며, 화성 탐사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미국 국민들의 실망 역시 컸습니다. 그때부터 화성 탐사에 돈을 쓰는 것이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이건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탐사가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성에 지금 생명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과거에 생명체가 존재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기 때문에 탐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1년, 세이건은 이타카에 있는 코넬 대학의 종신 천문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해에 세이건은 화성 탐사선 마리너 계획에 관한 일로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있는 NASA 제트추진 실험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프리랜서 작가 에릭 버거스와 리처드 호아그랜드와 함께 1972년 3월에 발사될 예정인 파이어니어 10호에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함께 실어서 보내자는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파이어니어 10호는 플루토늄의 붕괴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목성 탐사 임무 이후에 계속해서 먼 우주로 항해하게 됩니다. 그들이 했던 논의는 파이어니어 10호가 얼마나 항해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 먼 곳에서 어떤 지적인 외계 생명체와 만나게 될 지도 모르므로 이 우주선에 그런 생명체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함께 실어서 보내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놀랍게도 NASA는 이런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파이어니어 10호에 메시지를 담은 금속판을 부착하기로 했습니다. 이 메시지의 디자인은 1968년에 세이건과 결혼한 두 번째 부인 린다 잘츠만이 담당했습니다.

Pioneer10 plaque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새긴 파이어니어 금속판

1973년, 세이건은 조니 칼슨이 진행하는 심야 토크쇼인 투나잇 쇼의 끝부분에 5분 정도 출연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우주에 대한 내용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청중들과 시청자들은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3주 후에 칼슨은 세이건을 다시 출연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 교육에 있어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가치 있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우주생물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나 일반 대중들은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이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세이건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냉소적이고 보수적인 다른 과학자들의 견해에 개의치 않으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과학을 주제로 일반 대중들과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를 통해 과학에 별 관심이 없던 대중들이 과학이 제공하는 온갖 지적 탐험들과 호기심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무 의문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사물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지식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입증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9년, 세이건은 PBS 방송국에서 기획한 13부작 과학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 (Cosmos) 에 출연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BBC 방송국에서 제작했던 <인류의 상승> (The Ascent of Man) 과 경쟁하는 성격의 것이기도 했으며, 텔레비전을 통해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천체물리학, 진화론, 분자생물학, 지구 밖의 생명 탐사 등의 주제를 주로 다루었으며, 800만 달러 가량의 제작비가 지원되었습니다. 원래 제목을 '우주 속의 인류' (Man in the Cosmos) 로 하려 했으나 세이건의 아내 앤 드루얀이 제목의 'Man'이라는 단어가 성차별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을 하여 '코스모스' (Cosmos) 로 변경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아드리안 말론으로, 그는 <인류의 상승>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제작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말론과 세이건은 영화 <스타워즈>를 만들었던 특수효과 전문가와 NASA 제트추진연구소 출신의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를 고용하였으며, 과학적 정확성의 검증을 위해 100명 이상의 다른 과학자들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코스모스는 다큐멘터리 중에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60개국에서 5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반젤리스가 작곡한 오프닝 음악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이건은 텔레비전 시리즈와 병행하여 동명의 책 『Cosmos』를 1980년에 출판하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뉴욕 타임스』의 비소설 분야에서 1년 이상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1980년 10월 10일자 『타임』지에 '과학의 쇼맨'이라는 제목과 함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중 일부는 그를 비판하며 그의 대중적 성공에 대한 질투와 함께 그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이건은 이러한 험담을 무시하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아갔습니다.

1996년 12월 20일, 칼 세이건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후에 『Billions and Billions: Thoughts on Life and Death at the Brink of the Millennium』 (10억의 10억: 천년의 끝에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 환경 문제, 투병 생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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