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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사회참여―일간신문의 최근 논설을 중심으로」 (知識人의 社會參與―日刊新聞의 最近 論說을 中心으로) 는 1968년 1월에 발표된 김수영의 산문입니다.

본문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에 있어서 <주장>만이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불평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고, 또한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점은 유별나게 내 자신을 지목해서 말하는 것 같고, 그런 자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의 주변에도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주장>이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명령>으로 화하는 성질의 것이고, 이런 현상은 으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현상의 정치형태와의 관계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식의 선후의 순열을 가릴 수 없는 악순환의 수수께끼를 낳는다. <주장>은 독재를 보고 욕을 하고, 독재는 <주장>을 보고 욕을 한다. 그러다가 힘이 약한 <주장>이 명령을 넘어서서 어쩌다가 행동으로 나올 때, 독재가 어떠한 수단을 쓰는가에 대한 최근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누구나 다 하는 6·8총선거의 뒷처리 같은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힘과 힘의 대결이다. <설득>이 허용되지 않기는커녕 <주장>이 지하로 그의 발언을 매장시키기 시작한다. 지식인이 그의 의중의 가장 참다운 말을 못하게 되고, 대소의 언론기관의 편집자들이 실질적인 검열관의 기능을 발휘하고, 대학교의 강당을 <폭동참모본부>로 인정하게 되고, 월수 50만 원을 올리는 유행가수가 최고의 예술가의 행세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회의 상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을 근대화를 위한 <건전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의 코메디언까지도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게 되고, 신문사의 편집자는 民比(민비)사건의 피고 같은 것을 두둔하는 투서나 앙케트의 답장을 모조리 휴지통에 쓸어넣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설득>이 미덕이 아니라 범죄로 화한다.
<설득>에는 자유의 조건이 필요하고 방향의 제시를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하는데, 요즘 각 신문의 세모와 신춘의 특집 논설 중의 몇몇 개의 비교적 씨 있는 문화시론이나 좌담 같은 것만 보더라도 여전히 할말을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빠진 소리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문다운 신문이 없다는 것과 잡지다운 잡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주장>이고 <설득>이고 간에 지면이 없다. 민주의 광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고, 쇠사슬이 둘려 있고, 연설과 데모를 막기 위해 고급 승용차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인 여론을 계몽하는 기골 있는 신문과, 열렬한 문학작품을 환영하는 전위적인 종합잡지를 만들어내야 할 용지는 없어도, 고급차의 뒷자리의 두꺼운 유리창 밑에서는 하얀 두루마리 휴지가 정액에의 봉사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C신문은 대학교수들의 鼎談(정담)을 통해, <70년대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우리의 경우는 중소기업이 몰락위기에 있다든지, 혹은 농촌에 미처 손이 모자라 자원의 분배가 안된다든지 이러한 피치 못할 중대한 요인들이 있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뭉쳐지는, 조직되지 않은 어떤 폭발적인 요소가 70년대에 가면 표면화하지 않겠느냐……>고 사뭇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공정한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신네 신문이 지난 1년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의 긴급한 과제를 얼마나 주장하고 얼마나 실천했느냐를 먼저 반문하고 싶고, 그런 불같이 시급한 관점에서 볼 때 위기는 70년대가 아니라 바로 현재 이 순간이며, <조직되지 않은 어떤 폭발적인 요소가 70년대에 가면 표면화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방관적인 논평은 너무나 한가한 잠꼬대로밖에 안 들린다.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정치의 氣象指數(기상지수)와 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고,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정치의 기상지수 상한선을 상회할 때에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민비>사건의 피고들의, 이 재판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이라든가, 우리들은 6·8부정선거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말 같은 것이 예를 들자면 그것인데, 이런 정도의 주장을 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논설을 우리들은 하나도 구경해 본 일이 없다. D신문이 정월 초하룻날에 실은 J.D.듸로젤 교수의 「민족주의의 장래」라는 논설은,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들의 <적극적 중립주의>의 당위성을 논한, 우리나라의 필자라면 좀처럼 쓸 수도 없고 실리기도 힘들 만한 내용의 것인데, 이것을 비롯한 10편가량의 해외 필자들의 건전한 논단 시리즈를 꾸민데 대해서는 경하의 뜻을 표하면서도, 어쩐지 한쪽으로는 365일의 지나친 보수주의의 고집에 대한 속죄 같은 인상을 금할 길이 없다.
금년 들어서 C신문의 사설란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란 문화론이 실린 것을 읽은 일이 있는데, 이런 논조가 바로 보수적인 신문의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가장 전형적인 안이한 태도다. 그것은 서두에서 <경제성장을 서두르는 단계에서는 문화가 허술하게 다루어지기 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경향인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생활을 도외시하고 문화발전을 생각할 수 없듯이,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愚者(우자)의 낙원을 만들어 그 사회가 지니는 취약성이 끝내는 그 사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동서의 흥망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발전의 템포를 빨리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경제건설 다음에 문화발전을 이룩한다는 서열을 매기지 말고 발전의 표리로서 문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전제를 내세우고 나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암시로 문제의 초점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몽롱하게 얼버무려 넘어가고 있다. 즉, 그것은 본론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화의) 방향의 문제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동백림공작단사건이다. 그것이 비극적인 것은 문화인이 관련된 사건이면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지 않고 간첩 행위가 治罪(치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점이지만, 상당수 문화인이 그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자체는 간첩행위 이상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행위의 밑에 만의 일이라도 인터내셔널한 생각이 깔린 소치였다면 이는 관련자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일반 문화인의 성향과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 볼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문화인이 우리의 현실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관건으로서 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밀접히 관련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인터내셔널>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것이 <일반 문화인의 성향>과 어떻게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또한 따라서 그 다음의 <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어떻게 <밀접히 관련지어>져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추측해서 이 <인터내셔널>이란 말을 세계주의나 인류주의로 생각하고, 문화를 정치에서 독립된 (혹은 우월한) 가치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문화인이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어야 한다는 同社(동사)의 사설의 그 전날의 <지적>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한 말인가. 문화와 예술의 자유의 원칙을 인정한다면 학문이나 작품의 독립성은 여하한 권력의 심판에도 굴할 수도 없고 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어야 한다는 지적부터가 자가당착에 빠진 너무나 어수룩한 모독적인 발언이다. 학자나 예술가의 저서나 작품의 내용을 문제 삼고 간섭하고 규정하는 국가가 피고에 유리한 경우에만 그들의 저서나 작품의 내용을 문제 삼고, 그들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그것들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실례를 우리들은 일찍이 어떠한 독재국가의 판례사에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는 오히려 백이면 백이 번번이 그와는 정반대였던 것이 통례이다.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방향」의 필자는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나쁘다고 했지만, 나는 논법으로는 오히려 문화를 무시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원고료 과세나 화료 과세를 포함한 문화의 무시보다도 더 나쁜 것이 문화의 간섭이고 문화의 탄압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간섭과 위협과 탄압이 바로 독재적인 국가의 본질과 존재 그 자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의 문제는 언론의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고, 언론의 자유는 국가의 정치의 유무와 직통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이치를 몰각하고 무시하는 버릇이 신문뿐이 아니라 문화인 자체 안에도 매우 농후하게 만연되어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일이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각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물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으로,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이 글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有象無象(유상무상)의 정치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怪獸(괴수) 앞에서는 개개인으로서의 문화인은커녕 매스미디어의 거대한 집단들도 감히 이것에 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 글에서도 <막중한 정치권력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학원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정치권력이 점차 문화의 독자적 기능과 그 차원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더 큰 원인>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렇다면 오늘날의 문화계의 실정이 월간잡지의 기자들의 머리의 세포 속까지 검열관의 <禁制的(금제적) 감정>이 파고 들어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에비>라는 말의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란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다.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을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에비>를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名詞(명사)가 아닌>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다. 8·15직후의 2, 3년과 4·19후의 1년 동안을 회상해보면 누구나 다 당장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필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점이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이 실제 이상의 과대한 공포증과 비지성적인 퇴영성을 나무라고 독려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필자의 말대로 <이러한 반문화성이 대두되고 있는 풍토 속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의 창조의 그림자를 미래의 벌판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 <그 에비의 가면을 벗기고 伏字(복자) 뒤의 의미를> 아무리 <명백하게 인식해> 보았대야 역시 거기에는 복자의 필요가 있고 벽이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의 복자와 벽을 문화인도 매스미디어도 뒤엎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히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필연적으로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유아언어>이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의 이곳과 같은 <주장>도 <설득>도 용납되지 않는 지대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써놓기만 하고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생각하며 고무를 받고 있다. 또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응모작품 속에 끼어 있던 <불온한> 내용의 시도 생각이 난다. 나의 상식으로는 내 작품이나 <불온한> 그 응모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머지않아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신문사의 응모에도 응해 오지 않는 보이지 않는 <불온한>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이 나의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볼 때는 땅을 덮고 하늘을 덮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안에 대문호와 대시인의 씨앗이 숨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위기는 아득한 미래의 70년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있다. 이런, 어찌 보면 병적인 위기의식이 나로 하여금 또한 뜻하지 않은, 엄청나게 투박한 이 글을 쓰게 했다. 역시 비평은 나에게는 영원히 분에 겨운 남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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