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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웃었고, 일부 사람들은 울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문구를 떠올렸습니다; 비슈누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여러 팔이 달린 형상으로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1]

오펜하이머, 1965년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 앨러모스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2]

오펜하이머, 1945년 10월 16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내가 끔찍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가끔은 사실이더라고— 나에겐 친구보다 물리학이 더 필요해.[3]

오펜하이머, 1929년 10월 14일에 동생 프랭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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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4.22. - 1967.2.18.

개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는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고 해당 프로젝트를 직접적으로 주도했기 때문에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독일 제국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원자 폭탄 제작을 주도했었지만 원자 폭탄이 종전 후에 외교적인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그 후에 수소 폭탄의 개발에 반대하면서 책임자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어서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이 그를 더욱 유명하고 상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에 대해 세밀하게 다룬 책으로는 카이 버드마틴 셔윈의 공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 가 있습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는 오펜하이머 본인의 증언과 그의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검토해서 오펜하이머라는 사람의 생애와 특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평전입니다.

생애

어린 시절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오펜하이머(Julius Oppenheimer) 는 이민 1세대인 독일 출신 유태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엘라 프리드먼(Ella Friedman) 은 이민 2세대인 예술가였습니다.

5살이 되던 해인 1909년에 오펜하이머는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독일에 있는 할아버지 베냐민 핀하스 오펜하이머를 만나러 갔습니다. 베냐민은 그가 나무 블록을 쌓으며 노는 것을 보고 건축 백과사전 전집을 주었고, 20여 개의 암석에 독일어로 된 레이블이 붙어 있는 암석 수집 세트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암석 수집에 큰 흥미를 느꼈고, 얼마 후에 그가 사는 아파트에는 직접 수집하고 학명을 적은 암석 표본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암석에 관련된 책을 사다 주면서 그의 취미를 지원했습니다.

12세가 되었을 때, 오펜하이머는 뉴욕의 유명한 지질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한 지질학자는 그가 소년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에게 뉴욕 광물학 클럽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에 오펜하이머 부부는 그와 함께 광물학 클럽으로 갔고, 자랑스럽게 그를 'J. 로버트 오펜하이머'라고 소개했습니다. 그가 연단에 올랐을 때, 키가 너무 작아서 연단 위로 그의 머리카락만 보이자 사람들은 크게 웃었습니다. 그는 어디선가 가져온 나무 상자 위에 올라섰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준비해 온 원고를 읽었고, 강연이 끝난 후에 열렬한 박수를 받았습니다.

하버드 재학 시절

1922년 9월에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측에서는 그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지만, 그는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대학에서는 장학금과 함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기 저작 한 권을 주었습니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를 거의 사귀지 않았으며, 몇 안되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거의 모두 지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 오펜하이머는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으며, 철학, 불문학, 영어, 미적분학 입문 과정, 역사학, 기초 화학의 3개 과목―정성 분석, 기체 분석, 유기화학― 등의 다양한 수업을 수강하며 고민했습니다. 한때는 건축학 전공을 고려하기도 하였고, 고등학교 때 관심을 가졌던 그리스 어를 생각하며 고전학자가 되는 것도 고려했으나 그는 결국 화학을 선택했습니다. 3년 안에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한 학기에 신청할 수 있는 가장 많은 6개의 수업을 한꺼번에 수강하기로 하였고, 매 학기마다 또 다른 수업들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사회생활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종일 공부에만 몰두했는데, 별다른 노력 없이 탁월한 결과를 내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기에 공부하는 모습을 숨기려고 항상 노력했습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오펜하이머는 화학을 전공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실수로 여기게 되었고, 화학에서 좋아하던 것들이 실제로는 물리학에 더 가까운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화학 전공자로 분류된 상태였으나 다음해 봄에 물리학과에 대학원생 과목을 듣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물리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물리학 책 15권의 제목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모두 읽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이 되는 해인 1925년 6월에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화학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우등생 명단에 올랐으며,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의 모임인 파이 베타 카파 (Phi Beta Kappa) 의 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채, 친구인 윌리엄 클라우드 보이드, 프레드릭 번하임과 함께 기숙사의 방에서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알콜을 마시며 자축했습니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마음이 물리학으로 기울었기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어니스트 러더퍼드 밑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하버드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인 퍼시 브리지만에게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이후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를 불합격시켰으나 추천서를 J. J. 톰슨에게 보냈고, 톰슨은 오펜하이머의 입학에 동의했습니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1925년 9월 중순에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오펜하이머가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도착할 당시에 물리학계에서는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등을 위시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양자 역학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영국에 도착해서야 전자의 스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는 대학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모두 해결하였으며, J. J. 톰슨의 지하 실험실에서 전자와 관련된 실험에 사용되는 베릴륨 박막을 만들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작업은 엄청난 섬세함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이런 일에 서툴렀던 오펜하이머는 실험실을 회피하면서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물리학 잡지를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실험실에서 겪는 어려움과 함께 정신 상태가 악화되었는데, 실험실에서 자주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영국에 함께 온 친한 친구들이 가정을 이루어 정착하는 것 역시 그의 정신 상태에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었고, 지도 교수인 패트릭 메이너드 스튜어트 블래킷의 인정을 받고 싶었으나 그가 실험물리학자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자, 강한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고, 실험실에서 구한 화학 약품으로 만든 독을 사과에 발라 블래킷의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다행히도 블래킷은 사과를 먹지 않았으나 대학 당국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정신과 의사와 정기적으로 상담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케임브리지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망

오펜하이머는 1967년 2월 18일 오전 10시 40분에 잠을 자다가 사망했습니다. 이틀 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2월 25일에 프린스턴에서 추도식이 열렸으며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물리학회 특별 세션에서 기념되었습니다.

사진

점프하는 오펜하이머.jpg


위의 사진은 오펜하이머가 점프를 하고 있는 사진으로, 1958년에 필립 홀스만 (Philippe Halsman) 에 의해 촬영되었습니다. 홀스만은 유명 인사들이 점프를 하는 사진들을 찍었으며, 점프를 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사람의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이후에 『Philippe Halsman's Jump Book』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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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

  1. 원문 :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A few people laughed, a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 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2. 원문 : If atomic bombs are to be added as new weapons to the arsenals of a warring world, or to the arsenals of the nations preparing for war, then the time will come when mankind will curse the names of Los Alamos and Hiroshima.
  3. 원문 : I can't think that it would be terrible of me to say — and it is occasionally true — that I need physics more than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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