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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3


李載裕
1905.8.28. - 1944.10.26.

개요

이재유 (李載裕) 는 일제강점기에 노동 운동을 이끌고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학생 운동을 주도한 혁명가입니다. 신출귀몰하게 일제의 검거를 피해 도주하였기에 조선인들의 희망과 같은 존재였으며, 경찰과 여러 언론에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주시했었습니다. 이재유가 마지막으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형사가 총 60여 명이나 될 정도였습니다. 1942년에 형기가 끝났지만 전향서를 쓰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 감옥에 있다 1944년에 옥사했습니다.

이재유에 관련된 서적으로는 김경일 씨가 쓴 『이재유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3) 를 참조해보면 좋습니다.

생애

어린시절 ~ 학생 시절

이재유는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화전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이각범(李珏範) 은 300원 정도의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고, 별동면사무소 고원과 삼수군청 서기를 지내다가 1924년에 사망했습니다. 이재유는 1916년까지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아버지와 숙부로부터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삼수군의 공립 보통학교 5학년에 보결입학하기도 했으나 4개월 후 퇴학했습니다. 1924년 4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편입시험에 합격했으나 부친의 사망과 월사금 미납 등의 사유로 같은 해 6월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1925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는 송도고보에서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의 이성섭, 박필근, 김현진 등과 주로 교류하였고 1925년 9월에는 맑스 레닌주의 연구를 위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이후 이재유와 동급생들은 1920년대 반봉건운동의 일환이었던 반종교투쟁의 영향으로 주당 4시간의 성경시간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달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결행했습니다. 요구 조건이 정당했기 때문에 학교측에서는 퇴학 처분을 하지 못했었지만, 1926년 10월 17일에 이재유의 동급생이던 하규항의 부친인 하영록의 환갑잔치에서 술을 마시고 교사들에게 '기독교 학교의 교사가 술을 마셨다'는 매도를 했다는 이유로 이재유를 포함한 7명의 학생들에게 1926년 11월 5일자로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 당시 하영록의 환갑잔치에는 송도고보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초대되었으며, 해당 발언을 했던 것은 일부 입이 거친 학생들이었으나 이를 이용하여 학교 측에서는 이재유를 비롯한 급진적인 학생들을 퇴학시킨 것입니다.[1]

도쿄 시절

이후 이재유는 송도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당한 후 고학을 목적으로 1926년 12월에 도쿄로 가서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대지 못해 학비 문제로 얼마 후에 퇴학되었고 노동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도쿄 혼죠구 데라지마의 국민신문 출장소 배달부로 일하면서 김한경, 김계림, 윤도순, 인정식 등과 교류했습니다. 이때 이재유는 학생시절에 학생단체의 간부로 서로 알고 지냈던 김한경에게 공산주의 지도교양을 받았고, 공산주의 운동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후 그는 1927년 봄에 도쿄대학에서 신인회의 주최로 야학 노동학교가 설립되자 등록하여 2~3개월 가량 수학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동경합동노동조합, 전국무산자평의회 등의 좌익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이후 이재유는 조선인 노동 단체였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조직선전부원과 동경조선노동조합 북부지회 중앙위원,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과 신간회 조선지회 위원 등으로 여러 합법적 노동단체과 사상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1927년부터 이재유는 비합법적 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 11월쯤에 그는 고려공산쳥년회 일본부의 후보를 시작으로 1928년 4월 중순에 김한경이 책임비서인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위원이 되었고,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의 선전부 책임을 담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전일본무산청년동맹의 해산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재유는 그에 대한 항의문을 내무대신에게 보내고 그것을 각지의 운동가들에게 배포하려고 인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때 경찰에서는 이재유를 요시찰인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는 1928년 8월에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되기 까지의 3년 동안 무려 70여 차례나 경찰에 검속될 정도로 매우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1928년 8월에 이재유는 제 4차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예심에 회부되었고, 1930년 11월 5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치법 위반으로 3년 6개월의 징역과 500일 미결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1932년 7월에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경성형무소 출옥 이후

경성형무소에서 출감된 이후 이재유는 종로 연건동 35번지 김용식 집의 이인행 방에 기숙했습니다. 누이인 이분선과 함께 하숙하고 있던 이인행은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이재유의 7촌 조카였습니다. 이재유의 출감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했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기도 했습니다. 옥중에서 알게 된 이성출이 그를 자주 찾아왔고, 그를 통해 이후 이재유 그룹에서 활동하게 될 변홍대를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이 되는 김삼룡, 안병춘, 이순금 등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김칠성, 남만희, 서창, 양하석, 유순희, 유진희, 이동천, 이송규, 정백, 정의식, 정칠성, 황태성 등의 운동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정세판단과 운동방침 수립에 몰두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운동에 진출하기 위해 1933년 5월에 주소를 동숭동 29번지로 옮겼으나 7월에 김형선 등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신설동에 있는 사촌(砂村) 이라는 빈민촌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재유는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며, 더 이상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운동이 불가능하며 그에 따라 지하의 비합법 운동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세에 따라 운동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공유되던 방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의 중점을 노동자계급의 조직화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재유는 기존의 운동에 대한 비판과 평가를 통해 소수 지도자들의 중앙 담합을 통한 방식이나 지방의 대중적 기반도 없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놓고 세력을 키우려는 운동 방식을 지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이재유는 '조직은 파업이나 맹휴 등의 혁명적인 투쟁을 통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조직은 어디까지나 한 지방의 단일적인 조직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그가 고안한 트로이카 조직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안에 따라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전제로 서울지역의 당 재건을 위해 1933년 봄에 아래의 5대 슬로건을 만들었습니다.

  1. 모든 대중투쟁은 반전·반파쇼·반제 투쟁으로 전화하자!
  2. 섹트와 파벌 청산은 대중의 실천투쟁의 가운데에서!
  3. 당의 저수지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산업별 원칙으로!
  4. 당 재건은 대경영 세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재건에서!
  5. 선전·선동·조직·지도자인 전국적 정치신문을 창간하자!

— 조서 3839면

그리고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이재유는 아래의 3대 운동방침을 세웠습니다.

  1. 자신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 공장이나 경영 내에서의 기초 공작운동
  2. 다른 독자적인 볼셰비키적 활동선과의 결합
  3. 국제선과의 연락의 정립, 즉 국제선의 올바른 지도와의 결합

경성 트로이카

트로이카 조직의 특성

트로이카는 기존의 운동방식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이재유가 제시한 독창적인 운동방식으로, 당 조직 이전에 상호간의 접촉을 통해 이론적 일치를 도모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각자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운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래의 당 재건운동은 대중적인 기초 없이 전국적인 당을 먼저 만들고 나서 대중을 참여시키려고 하였기에 지도부와 대중이 쉽게 분리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트로이카라는 방식은 지도부가 직접 노동 현장에 참여하여 동지를 획득하고 그런 기초를 바탕으로 당을 재건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전의 문제점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이재유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트로이카 운동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운동경험과 같이 쓸데없는 조직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우선 노동대중의 불평불만이 있는 곳에서 공산사상의 선전선동을 하여 대중을 획득하고 상당한 그룹이 결성된 때에 비로소 조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종래와 같이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지도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것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내딛어 스스로 최하층의 노동자들과 교유하면서 대중층에서 동지를 획득하여 서서히 상부조직으로 전개하려고 한 것이 나의 근본방침이었다.

— 조서 3300 ~ 3302면

트로이카라는 명칭은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 트로이카 (тройка) 에서 유래했는데, 세 마리의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처럼 회원 전부가 각각 자유롭게 선전하고 투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2]

트로이카의 조직 과정

1933년 중순에 이재유는 안병춘을 만났습니다. 이재유가 종로의 김용식 집에서 하숙하던 당시에 안병춘의 어머니인 이안전이 그 집에서 방을 빌려 밥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안병춘은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재유는 안병춘과 사회 정세, 자본주의의 문제점, 조선의 운동 정세 등에 대해 설명하고 함께 토론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또 안병춘은 그의 친구들인 강양섭, 김칠성, 이동천 등을 이재유에게 소개하였고, 이재유는 신문 기사와 좌익 사상서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교양하고 지도했습니다.[3] 한편으로 안병춘에게 혁명적 노동 운동을 하려면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로 활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권유했습니다. 이에 동조한 안병춘은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직공으로 취직했습니다. 같은 해 5월의 한 회합에서 이재유는 안병춘에게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지하운동 노선이 몇 개 있으므로 서울에서 자신들이 운동하려면 다른 노선에 가담하고 있는 운동자를 최대한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며 공장 내에서 활동하는데 필수적인 운동의 조건과 목적, 방법 등에 대해 토론해서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하기로 합의했습니다.[4]

이처럼 최초의 트로이카는 1933년 5월에 조직되어 이재유와 안병춘으로 구성되었고, 같은 자리에서 그들은 변홍대를 포섭하자는 논의를 했습니다. 변홍대는 김형선의 지도 하에 있으면서 이재유와 제휴하기 위해 접촉했었고, 며칠 후에 찬성하여 트로이카에 합류했습니다. 1933년 6월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뒤에 있는 회춘원에서 이현상을 만났고 그도 트로이카에 합류했습니다. 원래 이현상은 이재유와 같은 사건으로 검거되어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알게 되었던 사이였습니다. 이어서 7월에는 지인이었던 이병기의 소개로 최소복을 만나게 되었고, 그 역시 승낙하여 5명의 상부 트로이카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소복의 합류는 이현상과 이재유의 최종 합의에 따라 승인되었기에 실제 상부 트로이카의 결성 시기는 1933년 9월이었습니다.[5]

노동 운동은 산별적으로 조직한다는 운동 방침에 따라 안병춘은 영등포를 중심으로 한 금속 부문을, 이현상은 동대문 밖 공장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섬유 부문을, 변홍대는 용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화학 부문을 담당하고 이재유는 그 전체의 총괄을 맡았습니다. 학생 운동에서는 남자 중등학교를 최소복이 담당하기로 했지만 여자 중등학교와 전문학교 이상, 대학은 담당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1933년 4월 이순금의 소개로 알게 된 이경선이 여자 중등학교 부문을 담당하고 1933년 7월에는 동향인인 김월옥을 통해 경성제국대학 학생인 정태식을 끌어들여 전문학교 이상, 대학을 담당하게 하여 모든 분야가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이재유는 대학과 전문학교를 구분해서 최소복을 통해 연희전문학교의 이동수에게 전문학교를 맡기려고 했지만 이동수가 시험 준비로 바쁘다는 이유 등으로 활동을 회피했기 때문에[6] 정태식이 맡게 된 것입니다.

Sn

  1. 조서 3801 ~ 3805면
  2. 『사상휘보』 제10호 293면
  3.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경제학』,『프롤레타리아의 사명』,『자본주의의 구조』,『인터내셔널』,『산업노동통신』등이었다.

    — 예심조서 제 1회 4332 ~ 4333면

  4. 조서 701면 및 2159 ~ 2161면
  5. 조서 2173면
  6. 조서 21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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