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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목욕탕 안에 있을 때 마침 해결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나 왕궁으로 향하는 대로를 알몸으로 뛰어가면서 외쳤다. "유레카! 유레카!" (Eureka! Eureka!)
이때가 언제였는지 그 날짜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날을 수리물리학의 창시일로 기념해야 할 것이다.”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로마 병사의 손에 아르키메데스가 죽었다는 것은 세계의 변화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추상과학을 사랑하며 이론적인 성향을 지녔던 그리스인들이 유럽을 지배하던 세상에서, 현세적인 로마인들이 유럽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rchimedes


Ἀρχιμήδης / Archimedes
약 BC 287 - BC 212

개요

아르키메데스 (Ἀρχιμήδης) 는 고대 그리스 시라쿠사 출신의 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공학자입니다. 그는 고대 세계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학자이며, 주된 분야였던 물리학과 수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대표적으로 물리학 분야에서는 정역학과 유체정역학을 연구하였고, 물질의 밀도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학 분야에서는 무한소수의 개념을 사용하여 원주율 \pi 의 근사값을 구하기도 했으며, 같은 높이의 원기둥가 있을 때 구의 부피가 같은 높이의 원기둥의 부피에 대해 3분의 2의 값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직 극한의 개념조차 없던 시대에 구분구적법을 창안하여 인류 최초로 적분을 한 미친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생애

  • 아르키메데스 아저씨는 너무 옛날 분이고 자료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 다룬다기보다는 그의 생애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에 대해 추적하고 있습니다.

생사에 대한 기록의 신빙성

아르키메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애석하게도 너무 옛날 분이다보니 객관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이 상상으로 지어낸 얘기들입니다. 흔히 전해져오는 '유레카' 같은 것도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고 그냥 전설일 뿐이므로, 화이트헤드처럼 유명한 학자들이 인용한 것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 일이 실제 역사 사료로 남아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선 아르키메데스 아저씨가 살던 시대에 대해 좀 알아보기 위해 고대 역사의 권위자인 월시 (P.G. Walsh) 의 연구 결과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그의 저서 『리비 (Livy), 그의 역사적 목적과 방법』에서 따온 인용문입니다.

BC (기원전) 400년부터 BC 200년 사이에 쓰여진 역사의 대부분은 매우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한 퇴보의 구체적인 이유는 아마도 틀림없이 수사학을 가르치는 학교의 발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의 저자들은 동정심이나 공포심과 같은 감정을 자아내어 독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참으로 '비극적'인 기술에 탐닉해 있었다. 특히 정복된 도시의 운명이나 유명한 인물의 죽음과 같은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결국에 현재 유통되고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생애에 관련된 이야기 역시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꾸며지고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당시의 기록조차도 그러한데 아르키메데스는 사후 2000년이 넘어가는 현재에까지 생애가 전해지면서 생애가 얼마나 많이 각색되고 조작되었는가 생각해보면 믿을 만한 기록을 찾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단편적인 조각이라도 더듬어서 이해해보기 위해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아르키메데스의 소년 시절이나 성인이 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없지만 대략적으로 그가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 시라쿠사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며 이후 BC 212년에 로마의 장군 마르켈루스 (Marcellus) 가 지휘하던 시라쿠사 포위 공격으로 시라쿠사가 함락되었을 당시에 로마 군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점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대한 기록 중에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꽤나 흥미롭습니다.

그는 혼자 도형을 그려놓고 온 정신을 수학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침입한지도, 도시가 함락된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한 병사가 다가와서 마르켈루스 장군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였으나 그는 문제를 다 풀기 전에는 자리를 뜰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병사는 격분하여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한 로마 병사가 그를 죽이려고 칼을 뽑아들고 그에게 다가섰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지금 풀고 있는 문제를 마저 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병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도 있다. 그가 해시계, 구, 태양의 크기를 재는 각도기 같은 수학 기구들을 옮기고 있을 때 어떤 병사들이 그가 상자 안에 보물들을 숨겨 운반하고 있다고 오해하여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 플루타르코스의 기록

플루타르코스는 대략 서기 46년에서 서기 120년에 살았던 역사가인데, 우리에 비해 아르키메데스 아저씨의 시대에 더 가깝던 그조차 그의 죽음에 대해서 세 가지나 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BC 59년에서 서기 17년에 살았던 역사가 리비 역시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나 현재에 알려진 것처럼 "내 원을 망가뜨리지 마라"라고 병사에게 말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12세기까지의 전설에는 심지어 아르키메데스가 당시에 그리스어로 "나의 도형을 밟지 마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야기가 점점 변형되고 과장이 붙는 과정이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역시 믿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어쨌거나 교차 검증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BC 212년에 시라쿠사에서 로마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생년에 대한 기록은 아르키메데스가 죽은 뒤 무려 14세기나 지난 시점에 살았던 역사가 체체스 (Tzetzes) 의 기록입니다.

박식하고 유명한 기계 제작자였던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사람으로 늙어서까지 기하학을 연구하였고 75년간 살았다.

— 체체스의 기록

우리는 여기에서 BC 212년의 75년 전인 BC 287년에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죽은 뒤 14세기나 지나서 역사가가 남긴 기록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져볼 만하기도 합니다.

유레카?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다던 그리스어 '유레카' (eureca) 는 '알아냈다'는 의미인데, 이 일화는 BC 1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 의해 전해진 내용입니다.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화관 (흔히 왕관으로 알려졌는데 원문 상으로는 화관이 맞습니다.) 을 금 세공사가 몰래 은을 섞어서 만들지 않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화관의 부피를 알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후 아르키메데스가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던 중에 어느날 공중 목욕탕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탕 속에 앉아 있는 동안 문득 탕 밖으로 흘러나온 물의 양과 물 속에 잠긴 그의 몸이 부피가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자 아르키메데스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탕 밖으로 뛰쳐나가와 발가벗은 채로 거리를 달리면서 "유레카! 유레카!"라고 외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아르키메데스의 업적 중에서 이 부분은 굉장히 지엽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곡면의 넓이, 구의 부피, 무게 중심, 부체의 안정성 등의 연구 결과가 훨씬 더 천재적인 부분으로 채워져있고 특히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원기둥의 부피와 구의 부피 사이의 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가 수없이 많은 우아한 발견들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를 그려넣고 원기둥의 부피와 구의 부피 사이의 비를 표시한 비문을 새겨달라고 유언하였다.

— 플루타르코스

이 내용은 BC 75년경에 로마의 감찰관으로 시라쿠사에 갔던 키케로가 기록으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시라쿠사에 로마 감찰관으로 갔을 때 폐허가 된 가시덤불 속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찾아내었다. 시라쿠사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아예 존재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들었던 몇 구절의 시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구절은 그의 묘비석에 구와 원기둥이 새겨졌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나는 시라쿠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아그리겐틴 문 근처의 공동묘지 덤불 속에서 살짝 밖으로 삐져나온 한 기둥을 발견하였다. 거기에 구와 원기둥의 표식이 있었다. 나는 즉시 시라쿠사인들 (몇몇 주요 인사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에게 이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았던 비석이라고 말하였다. 많은 장정들이 낫을 가지고 덤불들을 정리하고 청소한 후 드디어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무덤으로 다가가서 묘비를 관찰하였는데 묘비명의 반쯤은 지워져버렸고 또 줄의 끝부분들이 많이 닳아있었다. 그래서 만일 알피눔 (Arpinum) 으로부터 그 묘비명에 대해 배웠던 한 남자[1]가 없었더라면 한때 배움의 중심지였던 유명한 그리스 도시는 그 도시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무덤을 잊어버리고 말 뻔하였다.

누가 시라쿠사를 38년 동안 통치했던 정복자 디오니시우스보다 이 위대한 수학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한 사람의 정신은 영혼의 가장 달콤한 양식인 재능을 발휘하는 기쁜과 함께 빛나고 탐험적인 이론들로 기름졌고 다른 한 사람은 살인과 부당한 행위로 점철되었는데…….

— 키케로

잃어버린 저서와 재발견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들은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후기 문헌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자주 언급되는데, 여기에서 『방법』 (The Method) 이라는 그의 저서가 언급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이후 19세기까지 발견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 잃어버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중인 1906년덴마크의 수학사학자 J.L. 하이베르그가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당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에서 양피지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이 양피지는 여러 번 지우고 덧쓴 흔적이 있는 전형적인 팰림프세스트 (palimpsest) 였는데, 그리스 정교의 의식을 설명하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쓰기 위해 지운 이전의 글이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분석해보니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잃어버린 그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1907년 7월에 아르키메데스의 잃어버린 저서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뉴욕 타임즈」에 보도되었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다음날에는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설이 실리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왔습니다.

덴마크의 한 문헌학자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키메데스의 작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복사했다는 발표는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학자들은 이제 인류 수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회자되던 한 수학자의 미발표 작품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반면에 학생들은 이제 또 하나의 수학 교과서를 더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 뉴욕 타임즈의 사설

그러나 이 문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한 수도원의 소유였으며 수도원 측에서는 외국으로 이송하여 연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는 했지만 열람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이베르그가 이 문서를 찾아내고 분석할 수 있었던 것도 열람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이베르그는 이 문서를 결국 가져오지 못했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에 이 문서는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거의 70년이 지난 1998년 10월 27일, 「뉴욕 타임즈」에 "고대 아르키메데스의 작품 출현, 경매에 붙여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틀 뒤인 10월 29일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의 경매대에 이 작품은 다시 올랐으며 어느 익명의 프랑스계 가문의 소유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스 정교회 측은 경매가 이루어지기 전날에 미국 연방 법원에 그 유물이 자신들의 소유라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담당 판사는 어떤 물건을 사서 30년 이상 소유하면 그에 대한 권리가 생긴다는 프랑스 법의 조항을 인용하면서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이후 그리스 정교회의 고문 변호사는 190만 달러의 입찰가를 제시하였으나 낙찰에 실패하였고 어느 익명의 미국인 수집가가 200만 달러에 낙찰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익명의 수집가는 다시 다른 익명의 소유주에게 이 문서를 팔았습니다.

이후 그리스 정교회는 그 팰림프세스트가 누군가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법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겠다고 천명하였으나 결국 문서의 소유주는 그 문서를 아예 박물관에 전시해서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서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들은 안타깝게도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고대의 작품 중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에우클레이데스 등의 저작만이 예외적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 『부체에 관하여』

도보기

Sn

  1. Lihe 주 : 키케로 본인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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