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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不穩性>에 대한 非科學的인 臆測) 은 1968년 3월에 발표된 김수영의 산문입니다.

본문

지난 2월 27일자의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라는 拙論(졸론)에서, 본인은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문화의 본질로서의 불온성을 밝혀두었는 데도 불구하고, 이어령 씨는 이 불온성을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고의적으로 좁혀 규정하면서 본인의 지론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전체주의의 동조자 정도의 것으로 몰아버리고 있다.
전위적인 문화가 불온하다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재즈음악, 비트족, 그리고 60년대의 무수한 안티 예술들이다. 우리들은 재즈음악이 소련에 도입된 초기에 얼마나 불온시당했던가를 알고 있고, 추상미술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유명한 발언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암스트롱이나 베니 굿맨을 비롯한 전위적인 재즈맨들이 모던 재즈의 초창기에 자유국가라는 미국에서 얼마나 이단자 취급을 받고 구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즈의 전위적 불온성이 새로운 음악의 꿈의 추구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예는 재즈에만 한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이 그랬고, 고흐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맑스가 그랬고, 아이젠하워가 해석하는 사르트르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다.
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문화의 이치를 이어령 씨 같은 평론가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오해를 고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에 답변을 하려고 붓을 든 주요한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신변방어에 있지 않다. 그의 중상 속에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닌, 어떤 섹트적인 위험한 의도까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고, 그러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위험세력의 설정이 일반독자에게 주는 영향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것은, 불온하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발표를 꺼리고 있는 것이지, 나의 문학적 이성으로는 추호도 불온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어령 씨는, 내가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불온하다>고 낙인을 찍으려면, 우선 그 작품을 보고 나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의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보지도 않고 <불온하다>로 비약을 해서 단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법은 문학자의 논법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機關員(기관원)>의 논법이다. 아니, 요즘에는 기관원도 똑똑한 기관원은 이런 비과학적인 억측은 하지 않는다.
이어령 씨의 이번의 나에 대한 반론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의 모함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것을 일일이 가려낼 만한 의미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창작의 자유의 고발의 실제적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설명해 두고자 한다. 비근한 예가, 지금 말한 이어령 씨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의 소위 <불온시>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어령 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 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어령 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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