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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ez Euler, lisez Euler, c'est notre maître à tous. (오일러를 읽어라, 오일러를 읽어라, 그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스승이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Euler

Leonhard Euler


Leonhard Paul Euler
1707.4.15. - 1783.9.18.

개요

간략한 소개

레온하르트 파울 오일러 (Leonhard Paul Euler) 는 스위스 출신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입니다. 당대의 이과 계통 분야에서 오일러가 관심을 가지고 기여하지 않은 분야는 사실상 없을 정도였으며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말도 안되는 천재적인 기여를 한 오일러이지만 특히 수학 분야에서 남긴 업적으로 유명한데, 수학에 있어서도 그는 거의 모든 수학 분야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으며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와 같이 비교적으로 일상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일러가 기여한 수학의 분야를 생각해보면 정수론, 해석학, 복소함수론, 대수학, 기하학, 조합론, 그래프 이론 등의 정말로 엄청난 범위이기 때문에 여기에 일일이 다 적기가 힘들고 다 적는 것이 의미가 있지도 못하므로 생략합니다.)

수학 기호와 관련된 부분

오일러는 현대적인 수학 기호들의 대부분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수학자로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1734년에는 함수의 기호로 f(x) 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특이하게 오일러는 0으로 나누는 수식이나 \infty 기호를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오일러가 극한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쓰게 되었던 것인데, 오일러는 어떤 수를 0으로 나누면 무한대의 극한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lim_{t \to 0+} \frac {1 - x^t}{t} = - \ln x

와 같은 수식을 오일러는

\frac {1 - x^0}{0} = - \ln x

와 같이 0으로 나누는 방법으로 표기했던 것입니다.

생애

레온하르트 파울 오일러는 1707년 4월 15일스위스의 바젤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오일러는 성직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수학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오일러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언어적인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기억력 역시 굉장히 탁월해서 각종 연설문과 시, 소수 목록 등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오일러는 14살이 되던 해에 바젤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수학자 요한 베르누이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르누이는 바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오일러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오일러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베르누이를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베르누이는 오일러에게 각종 수학 논문들을 추천해주었으며 오일러가 이해하지 못한 수학적인 내용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의 대학이 종합적인 교육을 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일러는 사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주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법의 역사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고 석사 학위를 철학으로 받기도했습니다. 이후 오일러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부에 입학하였으며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일러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실력은 그리 늘지 않았는데, 천성은 숨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런 공부보다 수학에 대한 공부와 베르누이와의 만남 등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오일러는 얼마 뒤에 신학교를 떠나 수학자가 됩니다.

오일러는 수학자가 되면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그가 20살 때에 국제 과학 대회가 열렸는데 그는 범선의 돛을 어디에 달아야 가장 효율이 좋은가에 대한 논문으로 수상을 했습니다. 그는 오직 수학적인 통찰만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 것인데, 당시에 그는 살면서 아직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일이 없으며 배를 타본 적도 없었기에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후 1725년에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수학부 교수가 되어서 러시아로 떠났는데, 그 다음 해에는 오일러가 같은 학술원에 초빙되었습니다. 당시에 남은 자리는 물리학부와 의학부가 있었지만 수학부는 이미 꽉 차 있었고, 일자리가 그리 흔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에 오일러는 의학부 교수로 가기 위해 의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는 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각종 서적을 찾아보고 기하학의 관점을 동원하면서 인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일러가 1727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의학부가 아닌 물리학부에 임용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오일러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집에서 같이 지냈고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토론을 즐겼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던 중인 1733년에 다니엘 베르누이는 다시 스위스의 학계로 돌아갔으며 그의 수학부 교수 자리는 오일러가 이어받았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수학부 교수가 된 오일러는 러시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고 러시아 해군에 자문을 하기도 하고 소방차의 설계를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한편으로 오일러는 수학 문제에도 몰두하면서 바젤 문제라는 유명한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바젤 문제는 1689년에 요한 베르누이의 형인 야코프 베르누이가 수학계에 공식적으로 제시한 문제로,

1 + \frac {1}{4} + \frac {1}{9} + \frac {1}{16} + \frac {1}{25} + ... + \frac {1}{k^2}

형태의 무한급수가 수렴하는 정확한 값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수학자 중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으며 문제를 제안한 야코프 베르누이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일러는 1735년에 그 급수의 합이 \frac {\pi^2}{6} 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바젤 문제의 해결으로 유명해진 오일러는 계속해서 중요한 수학 논문들을 미친듯이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학술원 저널의 어떤 호는 절반 분량이 모두 오일러의 논문으로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적 전성기가 찾아왔음에도 오히려 오일러는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1세가 사망한 뒤에 계속된 정치적 혼란기가 있었으며 사회는 점점 경직되었고 외국인에 대한 불신감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이후 오일러는 이 시기의 러시아에 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을 교수형시키는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일러의 한쪽 눈이 시력이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 1738년에 오른쪽 눈이 완전히 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일러는 한쪽 눈을 잃은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수학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해석적 수론을 처음으로 창시하였고 분할 이론의 기초를 만들기도 했으며 아이작 뉴튼의 고전 역학을 정리한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일러의 업적들은 엄청나게 유명해졌으며,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 역시 베를린 학술원을 중흥시키기 위해서 오일러를 데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오일러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는 러시아를 떠나서 1741년에 베를린 학술원으로 떠납니다. 이후 오일러는 25년 동안 베를린에서 저명한 수학자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베를린에서 오일러는 해석학에 대해 연구를 하였으며, 한편으로 복소수에 대한 연구도 계속 진행하다가 엄청나게 아름다운 수식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e^{i \pi} + 1 = 0

이 수식이 바로 오일러 등식이며, 오일러는 오일러 공식을 먼저 증명한 뒤에 \theta\pi 인 경우를 생각해서 이 등식을 찾아냈습니다.

1783년 9월 18일, 오일러는 사망했습니다. 사망 당일 오전에 그는 열기구의 비행과 관련된 수학적인 문제에 대한 계산을 하였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시에 오일러는 천왕성의 특이한 궤도에 대해 설명하는 수식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가 만든 수식에 따라 이후 해왕성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오일러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다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서 사망했습니다. 이처럼 오일러는 사망하기 직전까지 오일러다운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는 후대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이 죽는 날에도 학회에 참석하여 신발을 신은 채로 죽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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