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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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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부.jpg


南到釜
1921.12.14. - 1955.8.

개요

남도부 (南到釜) 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남한유격대 총사령관입니다. 본명은 하준수 (河準洙) 이며, 널리 알려지고 있는 남도부란 이름은 한국 전쟁 당시 김일성이 만들어 준 가명입니다. 그가 투입된 유격대의 작전명 역시 남도부였는데, 남쪽(南)으로 부산(釜)에 도달(到)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수많은 전과를 세웠고, 종전 이후인 1954년까지 게릴라전을 하며 버텼으나 부하였던 차진철의 배신으로 군에 체포되어 1955년 8월에 처형되었습니다.

조선인민군 남한유격대를 이끌던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그와 친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인민당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했으며, 이승만을 존경하여 그의 경호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재등용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월북했던 일을 봤을 때도, 단순히 이념적인 문제로 북한의 편에 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남도부는 군사적인 부분에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남도부 부대는 그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인해 국군들이 가장 무서워하던 빨치산 부대였습니다. 이 때문에 몇몇 장군들은 그를 회유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사형되었습니다. 그의 항일 정신과 독립운동 참여는 정말 존경받을 만한 것이지만 조선인민군의 유격대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대접받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남도부는 여러모로 불쌍한 사람이면서 꽤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리산에서 미군에 반대하는 천왕봉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수많은 국군 병사들을 몰살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절대로 좋게 평가되기 어려운 인물로 남았습니다.

남도부의 생애에 대해서는 노가원의 『南道富』 (1992, 월간 말) 을 참조해보면 좋습니다. 출판 당시 가격은 상·하권 각각 5,500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남도부의 부하와 특무부대에서 근무했던 사람과 남도부의 친구나 집안 사람들까지 취재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남도부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한국전쟁의 기원) 의 한국어 번역본을 보면 함양 지역의 인민위원회를 지도했던 사람이 '전수하'라고 나오는데, 남도부의 본명인 하준수의 영어 표기 'Junsu Ha'를 잘못 보고 오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방 직후 함양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 남도부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역임이 거의 확실합니다.

생애

어린 시절 ~ 학도병 징집 거부

남도부는 1921년 12월 14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도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함양의 부호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하종택은 오랫동안 면장을 지낸 천석꾼이었습니다.

남도부는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중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서 퇴학당했습니다. 그 후, 아내 이귀영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여 일본의 준일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 그 다음 해에는 주오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가 대학 졸업반이던 당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도부는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인 함양으로 돌아왔고,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했습니다. 얼마 후, 은신골에 일본 경찰들이 단속을 오자 지리산의 칠선 계곡으로 은신지를 옮겼습니다.

보광당 ~ 조선건군준비위원회

함양 인근의 산에는 남도부와 같이 학도병 징집을 피해 은신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남도부는 이 사람들을 조직하여 1945년 3월에 함양 괘관산에서 보광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보광당의 소속원은 총 73명이었습니다.

무장저항을 하기 위해 나무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고, 여러 명이 그 몽둥이를 들고 인근의 주재소를 습격해서 총기를 조달했습니다. 다소 위험한 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 폭약을 제조하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하기도 하며 일제와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기습처럼 8월 15일에 해방이 찾아왔고, 남도부는 고심 끝에 보광당원들을 이끌고 하산하여 함양경찰서를 접수했습니다. 당시 함양경찰서에는 일본 경찰들이 30여명 가량 있었는데, 남도부는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보광당원들을 이끌고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들을 모두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함양경찰서와 함양군청을 접수한 남도부와 그의 동지들은 치안확보에 들어갔고, 남도부의 주도 하에 민선 군수와 경찰서장을 뽑을테니까 각 읍과 면에서는 대표를 보내달라는 공고문을 함양군 곳곳에 붙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선 군수로 양지환, 민선 경찰서장으로 박병구가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함양에서도 결성되었고, 남도부의 세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했습니다.

남도부는 중앙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국군준비대보다 앞서 조선건군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조선건군준비위원회는 남부영림서 함양관리소 자리의 연습림을 훈련소로 삼았습니다. 당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건군준비위원회의 결성식은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8.15 직후에 많은 사설군사단체가 조직되었는데, 남도부의 조선건군준비위원회 역시 그런 사설군사단체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조선건군준비위원회는 함양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일대에서도 막강한 군대였습니다. 위원장인 남도부의 인솔 하에 아침, 저녁으로 군가와 구령을 외치며 함양읍내를 행진했다고 합니다.

조선건군준비위원회의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증언에 따라 다릅니다. 조선건군준비위원회의 물자 조달책이었던 하종구는 징병, 학병자들이 모여 100명 정도였고, 실제로는 한 8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남도부의 집안 사람 중 한명은 1000명이 넘었고, 남도부의 지시로 함양과 안의에서 모포 1000장을 구해왔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남도부는 새생활운동이라는 것을 추진했는데 일제에서 해방되었으니 새나라 새생활을 실천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새생활운동의 일환으로는 마을 진입로 확장, 저수지 건설, 교량 설치, 우물시설 개선, 하천 둑 개조, 공동빨래터 만들기 등의 사업이 있습니다. 함양에서 산청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강정리로 들어가는 도로와 유림면의 어리 도로, 함양읍에서 백전면까지 있는 도로 등이 당시 새생활운동 때에 만들어지거나 확장된 것입니다. 또한 상림운동장 확장공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남도부가 모든 경비를 지원해주었습니다. 당시 남도부는 자기 집의 논을 팔아서 자금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도부는 자기 집안의 재산을 처분하면서 새생활운동을 추진했고, 집에 있는 쌀으로 조선건군준비위원회의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상으로 쌀을 나누어주기까지 해서, 늘 가진 자보다 못 가진 자를 위해 활동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미군정의 진주와 친일경찰 재등용

이후에 함양에 미점령군이 진주했고, 미군 측에서는 남도부와 만나 조선건군준비위원회와 미군이 협상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도부는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당시 미군정대장은 루이스 대위였는데, 남도부에게 우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김형석 함양문화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함양에 주둔한 미군정대는 1개 소대 정도 되었다 합니다. 미군정이 함양에 진주한 후 취한 첫번째 조치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일제 경찰들을 석방하는 조치였습니다. 이 조치는 머지않아 생기게 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을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함양의 실력자였던 남도부와 그의 세력에 대한 회유를 계속 하던 미군정은 1945년 11월 5일에 남도부의 어머니인 이의영이 타계했을 때 문상객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11월에 경상남도장관이 임명한 50여 명의 경찰들이 함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대다수가 일제경찰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함양경찰서로 들이닥쳤고, 민선으로 뽑힌 경찰서장 박병구에게 가서 도장관이 준 신임장을 보여주면서 물러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함양경찰서장으로 도장관이 임명한 사람은 석 모씨였다고 합니다. 이에 박병구는 미군정대장인 루이스를 찾아갔고, 루이스는 그 사람들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이에 석 모씨가 오니까 루이스 대위는 신임장을 보자고 했고, 신임장을 받아 든 다음에 빙그레 웃으며 그것을 찢어버리고 '함양에서는 민주적으로 서장을 뽑았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으니 물러가라'고 하면서 경찰들을 돌려보냈습니다.

한편으로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남도부를 포섭하기 위해서 여러 노력을 했으며, 조선공산당 함양군당위원장인 박병두가 남도부의 집 사랑방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도부는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에 가까웠기에 인간적으로 대한 것이었고, 박병두가 여러 차례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려고 했지만 거절하여 결국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미군정에 의한 남원 학살사건이 발생했고, 남도부는 미군정에 대한 분노를 느끼던 와중에 장인이었던 이민종이 이승만의 경호대장이 되어달라는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남도부는 동료들에게 서울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이승만의 경호대장이 되기 위해 떠났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남도부는 처갓집인 신설동 이민종의 집에서 머물다가 조선건군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국군준비대전국대회에 참여했습니다. 이 대회는 서울 계동 중앙고 강당에서 12월 26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서울에서 300명, 지방에서 160명이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김약산, 성주식, 조선공산당 조직책 이현상, 조선부녀총동맹 대표 김명 등이 연설을 했습니다. 국군준비대전국대회가 막을 내린 후에 남도부는 돈암장의 이승만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돈암장에는 미군이 경호를 담당하다가 한국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때 남도부가 경호대장으로 취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후

1954년에 부하 차진철의 밀고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았고, 1954년 10월 12일에 군사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도부는 자신을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청했고, 법정의 선서를 낭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955년 8월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고, 최후로 남긴 말은 '인민공화국 만세!'였습니다. 동양라디오에서 방송되었던 극작가 김교식의 <남도부사건>에서는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입니다.

그 외

이름 표기

남도부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예전에는 그의 출신을 뜻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남도부의 집안은 경상남도에 있었기 때문에 '南', 그가 태어난 마을은 행정구역 상 도천리이기 때문에 도천리의 앞글자를 따서 '道', 그의 집안은 함양의 부호였기 때문에 '富'라고 해석했는데, 남도부가 자신의 가명의 '부'가 한자로 부산을 뜻하는 '釜'라고 직접 말했다는 윤인호의 증언이 있기에 이 해석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윤인호는 남도부의 친구로, 일본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가 나중에 빨치산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南到釜라는 표기가 맞다는 것이 유력합니다. 남쪽(南)으로 부산(釜)에 도달(到)하는 것이 그가 이끌던 부대의 목표였고, 남도부 본인이 한자로 썼을 때 '釜'가 사용된다는 것을 말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록에는 '南道富'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옛날의 자료를 찾을 때는 南道富라는 이름으로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술 실력

남도부는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일본인과 상대하기 위해, 중학 시절부터 가라테를 배웠습니다. 그의 무술 실력은 실로 대단했으며, 실제로 몇몇 위기를 무술 실력으로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아래의 사례들이 그것인데, 이 사례들이 좀 흠좀무한 감이 있긴 합니다.

1) 그가 조직했던 항일운동 단체인 보광당의 당원들과 마을에 내려갔다가 경찰에게 걸려서 체포될 위기에 놓였을 때, 가라테 실력을 발휘하여 경찰들을 두들겨 패고 산으로 다시 피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2) 광복 이후에 친일파들을 재등용하던 미 군정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당시 미군 두 명이 그의 팔을 붙잡고 지프차에 태워서 군 본부로 이송하고 있었습니다. 남도부를 태운 차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길에 접어들면서 지면의 요철로 인해 심하게 덜컹거렸는데, 그 틈을 이용해서 팔꿈치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미군 두 명의 옆구리를 가격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지리산으로 피신했습니다.

성격

남도부의 성격은 과격하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단적으로 이광수와의 일화를 통해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었을 때 소설가 이광수가 학도병 징집 대상인 조선인 유학생들 앞에서 초청 강연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강연장 내부와 주변에는 순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광수는 당시 강연에서 "천황의 신민된 자로써 학병에 지원하여 성전으로 보답하라"라고 연설했습니다. 그러자 이 강의를 듣고 있던 남도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광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때려치워라 이광수, 이 변절자야. 우리는 옛날의 이광수를 사랑했지 오늘의 친일변절자 이광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네가 뭔데 남의 나라에다 조국의 청년들을 팔아먹겠다는 것인가" 라고 했습니다. 이에 유학생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강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광수와 함께 온 권설대 역시 물러가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남도부는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유학생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얼마 후에 석방 조치되었습니다.

이 일화를 보아도 남도부는 겁이 없고, 자신의 신념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에 맞서서 무장 투쟁을 했던 것이나 미 군정에 저항했던 일이나 함양경찰서를 습격했던 일 역시 남도부의 용기와 포부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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