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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暎
1921.11.27. - 1968.6.16.

개요

김수영 (金洙暎) 은 1945년부터 1968년까지 활동한 한국의 시인입니다.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실제로 그의 시 중에서는 독재에 대한 풍자나 자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그의 시는 단순히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적 이상이자 정치적 이상으로 여기면서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1]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생애

김수영 시인은 1921년 11월 27일 (음력 10월 28일) 에 서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김태욱 (金泰旭) 과 안형순 (安亨順)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수영의 증조부인 김정흡 (金貞洽) 은 종4품 무관으로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고, 할아버지인 김희종 (金喜鍾) 은 정3품 통정대부 중추의관을 지냈으며 집안이 부유하여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홍천 등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연 500석 이상의 양곡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나 김수영이 태어난 시기에는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의 여파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지게 되어서 얼마 후에 종로6가 116번지로 이사했고 아버지인 김태욱은 그곳에서 지전상 (紙廛商) 을 경영했습니다.

김수영은 1924년에 조양 (朝陽) 유치원에 입학했고, 1926년에는 계명서당 (啓明書堂) 에 다니다가 1928년에 어의동 (於義洞)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보통학교에 재학한 6년 동안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나 6학년이던 1934년 9월에 가을 운동회가 끝난 뒤에 장질부사에 걸렸고, 폐렴과 뇌막염까지 앓게 되어 3 ~ 4개월 동안 등교하지 못했고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못하며 진학 시험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1년 동안 요양 생활을 계속하였고, 그 사이에 집안은 용두동 (龍頭洞) 으로 이사했습니다.

15세가 되던 해인 1935년에 김수영은 건강을 회복했으며 아버지의 강권으로 인해 경기도립상고보 (京畿都立商高普) 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하였고, 2차로 선린상업학교 (善隣商業學校) 에 응시했지만 그곳 역시 불합격했습니다. 결국 선린상업학교 전수부 (專修部) 에 입학하였습니다. 1938년에는 선린상업학교 전수부를 졸업하고 본과 2학년으로 진학했습니다.

1940년에는 김수영의 집안이 현저동 (峴底洞) 으로 이사하였고, 다음 해에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김수영은 1942년 12월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영어와 주산, 상업미술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습니다. 이후 유학을 위해 일본 도쿄로 가서 선린상업학교 선배였던 이종구와 함께 도쿄 나카노에 하숙하며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조후쿠 (城北) 고등예비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곧 학교를 그만두고 쓰키지 소극장의 창립 멤버였던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았습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집안이 만주 길림성 (吉林省) 으로 이주했고, 김수영도 학병 징집을 피해 1943년 겨울에 귀국하여 종로6가에 있는 고모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후 쓰키지 소극장 출신이고 미즈시나 하루키에게 사사받은 안영일 (安英一) 을 찾아가서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았습니다.

1944년 봄, 김수영은 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으로 가서 길림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있던 임헌태, 오해석 등과 만났습니다. 다음 해인 1945년 6월, 길림 공회당에서 「춘수(春水)와 함께」라는 3막극을 상연했는데, 김수영은 이 극에서 권 신부 역을 맡았습니다. 8월 15일에 해방이 찾아왔고, 9월에 김수영과 가족은 길림역에서 무개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서 평안북도 개천에 도착하였고 개천에서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간 뒤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종로6가의 고모 집으로 갔습니다. 3 ~ 4개월 뒤엔 충무로4가에 집을 구해 옮겨갔습니다. 이 해에 김수영은 시 「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藝術部落) 에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자신의 진로를 연극에서 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1946년에 김수영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편입했다가 곧 그만두고 이종구와 함께 성북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하였고, 잠시 동안 박일영과 함께 간판을 그리기도 했으며, ECA 통역을 잠깐 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1950년에 김수영은 김현경 (金顯敬) 과 결혼하여 돈암동에 신혼 살림을 차리고 서울대학교 의대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강사로 출강했습니다.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6월 28일에 서울이 점령되자, 월북했었던 림화, 김남천, 안회남 등이 서울로 돌아와서 종로2가 한청 빌딩에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김수영은 김병욱의 권유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9월에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어 평안남도 개천으로 끌려가 1개월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10월 20일에 UN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김수영은 평양 북쪽의 순천에 배치되었으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하여 서울 충무로의 집 근처까지 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도에 수용되었습니다. 이후 김수영은 수용소 내의 미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되며, 그의 가족들은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로 피난하여 12월 28일에 피난지에서 장남 김준 (金儁) 이 태어났습니다.

1953년 겨울,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부산으로 가서 박인환, 조병화, 김규동, 김중희, 김종문, 김종삼, 박연희, 박태진 등과 재회했으며 《자유세계》의 편집장이었던 박연희의 청탁으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 포로동지들에게」를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박태진의 주선으로 미 8군 수송관의 통역관으로 취직했으나 곧 그만두고 모교인 선린상업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습니다.

1954년에 김수영은 서울로 돌아와서 주간 《태평양》에 근무하며 신당동에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피난지에서 아내가 돌아오자 성북동에 집을 얻어 분가했습니다. 1955년에는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6개월 가량 근무하였고, 1955년 6월에 마포구 구수동 (舊水洞) 으로 이사해서 번역을 하며 집에서 닭을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수영은 「」, 「여름뜰」, 「여름아침」 등의 시를 썼으며 김이석, 김중희, 안수길, 유정, 최정희 등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57년에 김수영의 「폭포」 외 5편의 작품이 김경린, 김규동, 김종문, 김춘수, 이인석 등의 문인들의 작품과 함께 묶여 사화집 『평화에의 증언』으로 출간되었고, 다음 해인 1958년 6월 12일에 차남 김우 (金瑀) 가 태어났으며 11월에는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습니다.

1959년에 그간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 (春潮社) 에서 <오늘의 시인 선집> 제1권으로 출간했습니다.

1960년에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고 규탄 시위 도중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실종되었다가 얼마 후에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분노한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이에 참여하면서 「하…… 그림자가 없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푸른 하늘을」, 「육법전서와 혁명」, 「만시지탄은 있지만」, 「가다오 나가다오」, 「허튼소리」,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거미잡이」, 「중용에 대하여」 등의 시를 써서 발표했습니다. 그는 혁명에 함께 참여하면서 기존의 규범적인 시를 부정하고 자유를 요구하는, 살아있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이후로 그의 독자적인 시론과 문학론이 형성되었습니다.

1968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했던 평론인 「지식인의 사회참여」로 인해 《조선일보》의 지상에서 이어령과 논쟁을 하며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등을 발표하였고, 이는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4월에 부산에서 열린 김수영 팬클럽 주회 문학 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시론을 발표하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경주시에 들러서 유치환의 시비를 찾기도 했습니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김수영 시인은 귀가하던 중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서 의식을 잃어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오전 8시 50분에 사망했습니다.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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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날카로운 눈빛.

김수영 시인의 눈은 매우 크고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특징인데, 매우 인상적이여서 시인의 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시 「달나라의 장난」에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본인도 자신의 눈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인환 시인과의 악연(?)도 유명합니다. 김수영 시인이 모더니즘적인 시에 심취했을 때 박인환과 매우 가까웠는데, 이후로 문학적 노선을 변경하면서 박인환 시인을 계속 비판하고 증오하였습니다. 1966년에 발표된 그의 산문인 「박인환」을 보면 장례식에도 일부러 가지 않았을 정도로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산문

Sn

  1. 김수영의 시대에서는 대표적으로 독재, 언론탄압, 반공주의를 가장한 사상의 자유 침해 등이 그 이상을 방해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사진

김수영4.jpg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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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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